전유성 진미령의 인생이야기
사람은 나이에 따라서 원하는 것이 변합니다.
거칠게 표현하면, 십대와 이십대는 주로 외모에 신경을 쓰고, 삼, 사십대는 돈과 사회적인 성공을, 오륙십대때는 안락한 노후 생활에 관심을 기울이죠.
보통 현재 자신이 원하는 것이 2,30년 후에도 여전히 내가 원하는 것인지를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스타 커플 전유성 진미령 부부 역시 그렇죠.
코미디언 전유성은 1949년 1월 28일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전유성 고향). 올해 66살이죠(전유성 나이).
(전유성 학력 학벌) 서러벌고등학교, 서라벌예술대학교 연극연출과
(전유성 프로필 및 경력) 1969년 MBC 방송작가로 데뷔
이후 KBS 유머 1번지, 쇼 비디오 자키 등에 출연하면서 80년대 최고의 코미디언 중의 한명이 됩니다.
그런데 전유성에게는 천재성이 엿보입니다. 그가 개그맨이라는 말을 최초로 만들었고(이 말은 원래 있던 영어가 아니라 전유성이 만든 신조어임), 공개 코미디 ‘개그콘서트’를 창시한 사람이며, 추억을 파는 카페 ‘학교종이 땡땡땡’으로 대박을 치기도 했습니다.
어떤 삼계탕집 개업 행사로 닭의 영혼을 위로하는 '위령제'를 기획했고, 이것이 입소문을 타는 바람에 그 삼계탕집이 대박을 치기도 했죠.
또한 1995년 ‘컴퓨터 일주일만 하면 전유성만큼 한다’를 펴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고 그외에도 약 서른 종의 책을 저술하기도 합니다. 또한 경북 청도에 코미디 전용극장을 열어서 성공시키기도 합니다.
그리고 인간성도 좋고 사람보는 안목도 높습니다.
전유성: "내가 운영하던 인사동 찻집에 친구들과 함께 놀러온 한채영의 모습을 본 후, 바로 내일 자신의 고향 시카고로 돌아간다는 한채영에게 '일주일 뒤에 다시 보자'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었다."
전유성: "모델 이소라의 매니저를 하고 있던 친구에게 한채영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저 친구는 틀림없이 스타가 될 친구이다. 시카고로 가서 한채영을 데리고 와라”고 말했다."
결국 한채영은 그 매니저를 따라서 한국으로 와서 인기 탤런트가 됩니다.
한채영 외에도 김원희, 이영자 등을 데뷔시켰고, 특히 신봉선·박휘순·안상태·황현희·김대범 등을 직접 가르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들이 바로 전유성의 코미디시장 단원(1기생)들이죠)
전유성: "방송사 공채 개그맨 시험 세 번 이상 떨어진 사람들 중에서 선착순으로 뽑았다. 공채 시험이란 게 보면 운이야 운. 천 명 넘는 아이들 중에 일곱 명 뽑히고 그래. 채점표 가려놓고 똑같은 사람 가지고 다시 뽑으라면 그 일곱 명 다시 뽑힐 거 같아? 아니거든. 점심 먹고 들어갔는지, 그날 채점자 배변 상태가 좋은지, 온갖 이유에 따라서 당락이 결정되는 거야."
전유성: "나도 네 번 떨어졌다가 겨우 붙었어. 한 번은 질문 하나도 못 받았고, 세 번은 딱 하나, 키가 몇이냐고 묻더라고. 이런 엿 같은 제도권 시험이 싫어서 난 그냥 개그하고 싶은 사람 오라고 했지. 그렇게 뽑으면 아이들이 끝까지 버텨서 뭐라도 배우고 나가."
전유성은 이렇게 뽑힌 단원들을 자비로 먹이고 입히고 재우며 개그를 가르칩니다. 그 후에 거의 대부분이 방송 3사의 개그맨으로 데뷔하는데 성공합니다.
아마 전유성이 없었다면 이들의 상당수는 진로를 바꿨거나, 혹은 더 큰 어려움을 겪은 후에야 데뷔할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전유성이 만든 청도 코미디 전용극장과 '개나 소나 콘서트' 역시 전유성의 능력을 확실히 보여준 기획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서울외의 지방 도시에서는 문화 행사가 성공하기가 굉장히 힘들니다. 거의 대부분의 좋은 문화시설들은 서울에 집중되어 있죠(소수는 광역시 위주로).
전유성: "난 원래 방송 관두고 편하게 유유자적 살려고 했던 사람이야. 어떻게 하다가 농촌 관광개발 경연대회가 열리는 걸 보고 심심해서 나가봤지. 등수 안에 들면 돈을 줬거든. 생각나는 대로 말했는데 ‘구라’가 먹혔는지 공무원들 서른 명이 얘기를 더 듣고 싶다면서 강의료 30만원을 들고 찾아왔더라고. 그렇게 해서 12억원 지원받아 코미디 전용극장이 세워진 거야. 자의 반 타의 반도 아니고 타의가 80%야."
이렇게 세운 청도 코미디 극장은 다른 지방에서도 보러 오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로 청도의 명물이 되었습니다.
‘개나 소나 콘서트’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전유성: "언제부터인지 애완견 키우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애완견의 ‘엄마 아빠’라고 하잖아. 개가 아프다고 하질 않고 ‘우리 애가 아프다’라고 하지. 애완견도 가족인 시대가 온 거야. 그러면 애완견도 문화생활을 해야 하지 않느냐고. 마침 청도에 사계절 텅텅 비어 있는 야외공연장이 있었고, 개들을 위한 콘서트를 한다고 하면 분명히 많은 사람들이 올 것 같아서 열었지. 사람들이 꼭 애완견을 데리고 와야만 하냐고 묻는데 대답은 ‘그렇다’야. 애완견이 없다면? 많이 데리고 오는 분들과 같이 오면 되지."
그런 전유성이 가수 진미령과 만나서 혼인신고 없는 결혼생활을 하게 됩니다.
사실 전유성은 원래 결혼을 했고, 자녀(자식)까지 있는 몸이었습니다(전유성 딸 이름은 전제비)(전유성 아내).
하지만 1988년 성격차이로 첫번째 부인과 이혼을 하고, 전처는 미국으로 떠납니다(전유성 전부인 이혼이유, 전유성 첫째 부인).
(전유성의 첫번째 부인은 일반인이었습니다.)
가수 진미령(본명 김미령)은 1958년 4월 5일에 태어났습니다(전유성 부인).
올해 57살이죠(진미령 나이)(전유성 진미령 나이차이는 9살).
(예명을 진담지로 개명했다가, 다시 원래의 진미령으로 바꿈)
(진미령 학력 학벌) 서울화교고등학교, LA산타모니카 칼리지
(진미령 프로필 및 경력) 제1회 MBC 서울가요제에 '소녀와 가로등'(장덕 작사,작곡)으로 데뷔
1975년 영사운드 1집 앨범 [Peace ...... Since 1972]
1979년 2집 하얀 민들레/비누방울로 어린 나이에 제법 인기를 얻었습니다.
진미령의 가족중에 유명한 사람으로 그녀의 아버지가 있습니다(진미령 아버지 김동석 예비역 대령).
김동석 대령은 미국 정부가 뽑은 한국전쟁의 "4대영웅"중의 한명입니다.
(4대 영웅 - 맥아더장군, 리지웨이 유엔군총사령관, 백선엽 대장, 김동석 대령)
원래 첩보부대에서 활동을 했기에, 전후에도 해당 작전들은 대부분이 기밀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후에 기밀이 해제됨)
진미령과 아버지 김동석 예비역 대령 사진
육사 8기 출신인 김동석은 제17연대 11중대장으로 625에 참전해 박성철이 지휘한 북한군 15사단을 전멸시켰고, 1950년 9월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소속 미군 연락장교로 발령받아 첩보세계에 입문해 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작전에서 결정적인 첩보를 입수하게 됩니다.
또한 625 도중에 김일성 생포 작전에 투입되기도 합니다.
김동석: "내가 지휘했던 제36지구대는 원산 앞바다 능도와 여도에 제2지대를 배치했다. 당시 원산을 방문했던 김일성을 잡기 위해 투입됐으나, 그가 이른 새벽에 떠나는 바람에 간발의 차이로 실패했다.
다시 매복했던 공작원들이 북한 이영희 사단장을 생포 귀순시켰다."
당시 김일성이 피웠던 담배 꽁초의 온기가 남아 있을 정도로 간발의 차이였습니다. 정말 안타깝네요.
(후일 김동석은 강원도 삼척 군수와 강릉 시장, 목포 시장 등을 역임합니다.)
진미령이 어렸을 적에 화교라는 루머가 돌기도 하는데, 이는 와전된 것입니다.
김동석: "중국 대사와 개인적 친분이 있어 한때 미령이를 중국인 학교에 보낸 적이 있다. 미령이가 대만에 1년 유학한 적이 있는데 이런 일들이 잘못 와전된 것 같다."
그렇게 70년대에 가수활동을 하던 진미령은 1980년 홀연히 미국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진미령: "2남2녀중 나를 빼고는 모두 대학원 출신이어서 학벌에 대한 콤플렉스가 심했던지 공부를 하고 싶었어요. 또 고교를 졸업하자마자 부른 노래들이 잇따라 히트하는 바람에 너무 쉽게 인기를 얻었죠. 할만큼 했다는 생각에 가요계에 큰 미련이 없었어요."
로스앤젤레스 산타모니카 칼리지에서 인테리어 디자인을 전공했지만, 그 이후의 이민 생활은 그리 녹록치가 않았습니다.
진미령; "식품점은 물론 가구점 공장에서도 일했고 나중에는 좌판장사까지했었어요. 이때 정말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지 알았고 '사람'이 됐지요."
진미령은 88 서울올림픽때 잠깐 통역으로 자원봉사를 했고, 이후 1990년 귀국을 해서 다시 가수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리고 방송 활동을 하다가 전유성을 만나서 연애를 시작했고, 1993년에 결혼식을 올립니다(진미령 남편).
전유성 진미령 결혼 사진
그런데 당시 전유성 진미령 부부의 특이한 결혼식으로 세간의 화제가 됩니다.
둘 사이의 혼인신고는 없고, 또한 둘 사이의 자녀도 낳지 않으며, 서로의 생활을 존중해 준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이런 약속에 따라서 진미령은 딸이나 아들이 없습니다. 진미령 딸이 아니라 전처의 딸이었죠.)
전유성: "내가 담배를 안 피운다고 해서 상대방에게 끊을 것을 요구하지 말고, 자기가 술을 안 마신다고 해서 상대에게도 못 마시게 하진 말자. 어디서 들으니 마누라가 술 먹고 들어왔다고 따귀를 올려 붙인다는 남편이 있대요. 말이 돼요?"
전유성: "내가 싫어하는 걸 상대에게 하지 말라고 한다면, 반대로 상대도 자기가 싫어하는 것을 하지 말라고 강요할 수밖에 없어요. 우리는 서로 좋아하는 것에 대해 철저하게 존중해줘요. 이 사람은 포커를 싫어하는데, 난 가끔 포커하고, 또 이 사람은 나이트클럽에 가서 춤추는 걸 좋아하니까 가끔 춤추러 가요."
아마 전유성의 이런 자유방임적인 결혼 생활에 진미령 역시 강렬하게 끌렸던 것 같습니다. 진미령 역시 이십대를 미국에서 보냈기에, 배우자끼리 서로 억압하지 말자는 전유성의 제안에 호감을 가졌을테고요.
물론 진미령은 후에 좀 다른 이유를 말하기도 합니다.
진미령: "유성이 형은(진미령이 전유성을 부르는 호칭) 재혼이고 나는 초혼이다. 호적에 제비 엄마(전처) 뒤에 둘째 부인 자리에 내가 들어가는 게 너무 싫었다."
아마 진미령은 자존심이 강한 성격같습니다. 미국 유학 역시 그런 면이 작용했죠.
그러다가 둘은 2000년대 중반에 이혼을 하고, 그 소식은 훨씬 나중에 알려집니다.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지만, 사실혼 관계였으니 이혼이라는 말이 적당하네요.)
여기에 대한 이혼사유를 둘은 이렇게 밝힙니다.
진미령: "냉면이 먹고 싶어 남편과 만나기로 한 적이 있어요. 냉면집에 도착했을 때 남편은 이미 혼자 냉면을 다 먹고 난 후였죠. 하지만 함께 있어주겠다고 해서 제가 주문한 냉면을 먹으려는데, 갑자기 ‘난 다 먹었고 보는 건 지루하니 먼저 가겠다’는 거예요. 당황해서 순간 아무 말 못하고 있는데 정말 가버리더군요. 그때 헤어져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진미령: "냉면을 먹는 이 짧은 순간도 기다려주지 못하는데 앞으로 어떻게 인생을 함께 살아나가겠어요. 10년 동안 참아왔던 것이 표출된 계기였어요."
반면에 전유성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전유성: "진미령과 관련된 이야기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
그러다가 전유성은 후에 이렇게 자책합니다.
전유성: "난 단란한 가정을 하기에는, 자격이 없는 사람인 것 같다. 돈벌이도 그렇고 가정적인 성격도 못 된다. 많은 면에서 부족했다."
먼저 진미령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남편 전유성은 굉장히 배려가 없는 사람입니다. 냉면 먹는 동안도 기다려주지 못하는 남자니까요.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 자유롭게 산다고 하더라도, 서로 대화나 배려는 일반 부부와 다름없이 해야 하지만, 전유성은 최소한의 의무조차 지키지 못했습니다.
배려 없는 부부란 남남보다 못한 존재죠.
그 다음에 전유성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전유성의 이런 행동은 젊은시절부터 있어왔던 행동이라는 점입니다.
후배 이봉원: "언젠가 "형(전유성) 딸래미 이름이 제비가 뭐예요?"라고 했더니, 유성이 형이 "제비 엄마랑 첫날밤 잔 여관이 제비장 여관이야. 그래서 그렇게 지었어"라고 했다."
전유성 딸 전제비 사진
외동딸 전제비: "아빠가 지어준 전제비 이름은 어른이 된 지금도 익숙하지 않다. 전제비라는 이름 때문에 ‘강남제비, 수제비’등 놀림을 많이 받았다." (현재 전제비 나이는 35살)
전제비: "중학교 2학년 때 아빠가 학교를 그만두고 산에 들어가라고 했다. 타짜가 되라고 하시더라. 학교는 마칠 수 있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전제비: "아빠에게 나의 미래에 대해 물었는데 '아무거나 해'라는 대답을 듣고 섭섭했다. 나이가 먹고 '나도 자식을 아빠처럼 키워야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동료 개그맨들과 가족의 증언을 보더라도 전유성의 기인같은 행동은 젊은 시절부터였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실제 성격은 딸을 시집보내는 중대사에서도 마찬가지였죠.
전제비: "시댁과의 상견례 때 (아버지가) 기본적인 질문들은 하지 않고 '내가 반대하면 결혼 안 할 거냐'고 딱 한 가지 질문만 한 뒤 가수 조영남 씨를 만난다며 가셨다."
전유성: "반대해도 결혼한다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냐. 나머지는 같이 살다보면 알게 된다."
전유성의 말에 일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더라도 상견례 자리에서는 사돈댁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야 하지 않나 싶네요.
어쨌든 전유성은 젊은 때나 지금이나 이런 기인같은 행동을 했지만, 젊은 시절의 진미령은 아마 그런 모습까지도 매력적으로 보였을 겁니다. 삼계탕 집에 대한 엉뚱한 기획이나, 책을 내고 다양한 공연을 기획하는 전유성의 모습을 보고, 실제로 진미령 역시 자극을 많이 받았죠.
1997년 에세이집 '유성아 뭐 먹고 싶니' 역시 남편 전유성처럼 본인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책을 냈고(총 5권을 냄), 그 이후의 음식 사업 역시 적극적으로 한 힘이 되었죠.
하지만 진미령은 나이가 들면서 점차 전유성에게 다른 모습을 요구합니다. 바로 부부간의 배려죠.
과거 진미령은 이런 말을 한적이 있습니다.
"전유성이 느닷없이 지리산 인도 등 훌쩍 여행을 떠나서 3개월 씩 집을 비우기도 한다. 또, 느닷없이 전화해 "일본에 있다"고 말한 적도 있다."
이렇게 서로의 일과 생활을 존중한다는 것은, 점차 세월이 흐를수록 진미령에게 상처가 되는 일이 되었습니다(전유성 진미령 이혼이유, 진미령 전남편 전유성).
아마 냉면 사건 역시 진미령이 이십대나 삼십대였다면 별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점점 배우자와의 배려와 대화가 중요해지는 오십대, 육십대에 이르러서는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죠.
이렇게 배우자간에는 이, 삼십대에 매력적으로 보였던 장점이나 그다지 흠이 되지 않던 단점이 사, 오십대에는 이별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배우자를 선택할 때, 보통 배우자와의 행복을 상상하기는 하지만, 2, 30년 후의 미래에 두 사람이 어떻게 변할지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현재 내가 원하는 것을, 2,30년 후에도 여전히 원할까?
한번쯤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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